사이언스 타임즈지난 45년 달 밟은 인간 없었다


지난 45년 달 밟은 인간 없었다

[이태형의 생활천문학] 이태형의 생활천문학 82


지난 16일 아폴로 17호의 선장이었던 유진 서난이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유진 서난은 달 위의 마지막 인간이었으며, 달 위에 가장 오래 머물렀던 인간이기도 했다.

그와 동료들이 아폴로 17호에서 촬영한 ‘블루 마블(The Blue Marble)’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진 중 하나다. 1972년 12월 14일, 유진 서난이 달을 떠난 이후 45년이 다 되도록 아직 달을 밟은 인간은 없다. 지구 궤도를 벗어난 유인 우주선도 없었다.

1968년 12월 21일 아폴로 8호가 달을 향해 발사된 이래 불과 4년 동안 미국이 달에 보낸 아폴로 우주선은 9대나 된다. 그 중 6대가 달에 착륙했고, 12명이 달의 땅을 밟았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달을 밟지 못했다. 왜 미국은 유인 달 탐사를 멈췄을까? 그리고 다른 나라는 왜 아직까지 달에 가지 못하는 것일까?

오늘은 아폴로 계획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아폴로 17호가 촬영한 지구 ‘The Blue Marble’ ⓒ NASA


아폴로 계획

아폴로 계획은 1961년부터 1972년까지 미국 항공우주국 NASA에서 진행한 유인 달 탐사 계획이었다. 1957년 10월 4일, 구 소련은 세계 최초로 스푸트니크 1호 위성을 발사했고, 이에 충격을 받은 미국은 1958년 7월 미국항공우주국 NASA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우주 개발을 시작했다.

그 첫 번째 목표가 바로 유인 우주 비행 계획인 머큐리 계획이었다. 머큐리 계획은 지구 궤도를 도는 1인승 우주선을 이용하여 인간이 우주 공간에서 생존할 수 있는 가를 확인하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1961년 4월 12일, 구 소련의 유리 가가린이 보스토크 1호를 타고 최초의 우주인이 되는 순간 미국은 또 한 번 충격에 빠졌다. 미국은 실의에 빠진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고, 우주 경쟁에서 구소련에 우위를 차지할 방안이 필요했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나기 전인 5월 5일 엘런 셰퍼드가 프리덤7호를 타고 15분간의 탄도 비행을 통해 미국 최초의 우주인이 되었고, 이에 고무된 케네디 대통령은 5월 25일 의회 연설에서 미국이 1960년대 말까지 인간을 달에 착륙시킨 후 무사히 지구로 귀환시키겠다는 연설을 하게 된다. 이것이 아폴로 계획의 시작이었다.

미국은 1964년부터 1966년까지 2인승 우주선을 이용한 제미니 계획으로 우주 유영과 우주선 도킹 기술을 실험하였고, 1967년부터 3인승 우주선을 이용한 본격적인 유인 달 탐사 계획인 아폴로 계획을 추진하였다. 아폴로 우주선은 사령선인 달 궤도선(CSM)과 달 착륙선(LM)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케이프 케너베럴 공군 기지의 34번 발사대에 새겨진 아폴로 1호의 기념 로고. ⓒ NASA


아폴로 1호의 참사

아폴로 계획은 시작부터 어려움이 많았다. 1967년 1월 27일, 지구 궤도를 선회할 목적으로 발사대에서 시험 작업을 하던 아폴로 1호에 화재가 발생하여 우주인 3명이 질식사하는 비극이 있었다.

우주 비행사가 우주선 내부에서 사망한 것은 아폴로 1호가 최초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나사는 우주선의 설계를 변경하였고, 우주 비행사들이 보다 안전하게 우주를 비행할 수 있게 되었다.

아폴로 계획에는 아폴로 2호와 3호가 없다. 아폴로 1호가 폭발하기 전 두 번의 무인 비행이 있었는데 이들이 비공식적으로 아폴로 1호와 2호였다. 그러나 폭발 사고 이후 사망한 우주인들의 이루지 못한 꿈을 애도하는 뜻에서 공식적인 아폴로 1호의 명칭을 유인 비행에 붙인 것이다.

그로부터 1년 9개월 후, 아폴로 1호의 화재 사고가 났던 케이프 케너베럴 공군기지의 34번 발사대에서 최초의 유인 아폴로 우주선인 아폴로 7호가 발사된다. 그 날 이후 34번 발사대는 폐쇄되었고, 아폴로 1호 희생자들을 기리는 기념물로 남겨졌다.

올해로 아폴로 1호의 참사가 발생한 지 50주년이 된다. 존슨 우주 센터 등 많은 곳에서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행사가 준비되고 있다.



아폴로 8호가 달 궤도에서 촬영한 지구돋이. ⓒ NASA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1968년 12월 24일, 드디어 아폴로 8호가 달 궤도에 도착했다.  아폴로 8호는 지구 궤도를 벗어나 다른 천체의 궤도를 돈 최초의 유인 우주선으로 기록되었다. 당시 아폴로 8호가 촬영한 지구돋이 사진은 인류에게 가장 큰 크리스마스 선물이 되었다.

아폴로 8호에 탑승했던 짐 로벨은  “내가 아는 모든 것들 – 나의 삶, 사랑하는 사람들, 해군 -, 전 세계가 내 엄지 손가락 뒤에 있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는 1년 반 후 아폴로 13호의 선장이 되어 다시 달로 갔지만 산소 탱크 폭발로 끝내 달에 내리지는 못했다. (지구돋이 사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이태형의 생활천문학 21, 크리스마스 이브, 달에서 본 지구를 참조하기 바람)

1969년 7월 20일. 드디어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했다. 닐 암스트롱 선장과 버즈 올드린이 달을 밟으며 아폴로 계획을 완성시켰다. 달에 도착한 암스트롱은 “이것은 한 인간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That’s one small -step for man, one giant leap for mankind)”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아폴로 11호의 성공적인 달 착륙 이후 나사는 아폴로 20호까지 9번의 추가적인 탐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산상의 문제로 세 번의 발사가 취소되었고, 아폴로 17호를 마지막으로 아폴로 계획은 마무리 되었다.

아폴로 계획은 유인 달 탐사의 목적을 달성한 것 이외에도 로켓과 우주공학, 전자 통신, 컴퓨터 등 다양한 분야의 기술 진보를 촉진시켰다.


아폴로 11호의 닐 암스트롱 선장이 찍은 버즈 올드린의 모습. ⓒ NASA


아폴로 계획 이후

아폴로 계획이 끝날 무렵인 1972년 1월 5일,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나사의 다음 목표를 “ 재사용이 가능한 저렴한 우주왕복선을 개발하는 것’으로 선언하였다. 이로써 인간의 달 착륙은 관심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고 아폴로 계획도 마무리 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예산이었다. 1960년대 말 아폴로 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 미국은 전체 예산의 5% 정도를 우주 개발에 사용하였다. 아폴로 계획에 들어간 총 예산은 1,000억불에서 1,700억불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예산 문제 이외에도 단순한 달 탐사를 넘어서 달을 이용하기 위한 기술 진보의 시간도 필요했을 것이다.

구 소련 역시 미국의 달 착륙 이후 달에서 관심을 잃었고, 미국과의 경쟁에서 앞서기 위해 우주정거장 개발에 집중하였다. 그 결과 구 소련은 미르 우주정거장을 건설하게 되었다. 그 외의 다른 나라들은 미국이나 구소련에 비해 기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달 탐사를 감행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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